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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예

옷소매 붉은 끝동 14회 15회 줄거리 이준호 이세영 시청률 기획의도 회차정보 정조 후궁 의빈성씨 화빈윤씨 ⭕️ 자녀는 몇명? 산이 덕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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옷소매 붉은 끝동 14회 15회 줄거리 이준호 이세영 시청률 기획의도 회차정보 정조 후궁 의빈성씨 화빈윤씨 ⭕️ 자녀는 몇명? 산이 덕임이



▣ 드라마 ‘옷소매 붉은 끝동’ 시청률

(2021. 12. 25 시청률)
‘옷소매 붉은 끝동’ 이준호-이세영이 먼 길을 돌아 사랑을 확인했다. 애타는 가슴앓이 끝에 폭발적인 여운을 선사한 ‘옷소매 붉은 끝동’은 자체 최고 시청률을 다시 한 번 갈아치우며 동시간대 1위를 수성, 파죽지세의 행보를 이어갔다.


시청률 조사회사 닐슨 코리아에 따르면 ‘옷소매 붉은 끝동’ 14회의 시청률은 전국 13.0%, 수도권 12.7%, 2049 5.0%, 최고 15.6%를 기록했고, 15회는 전국 14.3%, 수도권 13.8%, 2049 5.2%, 최고 14.9%를 돌파하며 갈수록 열기를 더해가는 모양새다.




▣ 드라마 ‘옷소매 붉은 끝동’

총17부작인 주말드라마 <옷소매 붉은 끝동>은 자신이 선택한 삶을 지키고자 한 궁녀와 사랑보다 나라가 우선이었던 제왕의 애절한 궁중 로맨스


▣ 드라마 ‘옷소매 붉은 끝동’ 출연진

이준호(이산 역), 이세영(성덕임 역), 강훈, 이덕화, 박지영, 장희진, 장혜진, 조희봉, 서효림, 강말금, 오대환, 이민지, 하율리, 이은샘, 문정대



▣ 드라마 ‘옷소매 붉은 끝동’ 14회 15회 줄거리


14-15회는 이산(이준호 분)과 성덕임(이세영 분)의 사랑이 홍덕로(강훈 분)의 폭주와 함께 절체절명의 위기를 맞이하는 모습이 그려졌다.


산은 정치적 압박에 의해 덕로의 누이동생인 원빈(박서경 분)을 후궁으로 들였지만 후궁 처소에서 밤을 보내는 대신 대전에서 번을 서는 덕임의 곁으로 돌아오며 흔들림 없는 사랑을 보여줬고, 덕임은 그런 산의 모습이 내심 기뻤다.




반면 외척이 된 덕로는 관상감을 꼬드겨 합궁일을 조작했다가 발각되는 등 끝 모를 야욕을 드러냈고, 산은 계속되는 덕로의 무리수에 점점 그를 멀리하기 시작했다.


그러다 궁 생활에 적응을 하지 못하고 울증을 겪던 어린 원빈이 급사하는 안타까운 일이 발생했다. 이 같은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한 덕로는 원빈의 피살을 주장하며 중궁전을 용의자로 몰아가려 일을 꾸몄다.


이 과정에서 궁녀들이 실종되기 시작하고, 덕임의 동무인 경희(하율리 분)까지 행방불명 되고 말았다. 덕임은 사라진 경희가 걱정돼 어쩔 줄 모르던 차에 끝내 산에게 궁녀들의 실종사건을 조사해달라고 울며 간청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산은 도승지인 덕로에게 사건의 빠른 해결을 명했지만, 사건을 일으킨 장본인이 덕로인 만큼 사건은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기다리다 못한 덕임은 복연(이민지 분)-영희(이은샘 분)와 함께 직접 경희를 찾아 나서고, 배후에 덕로가 있음을 알아냈다. 덕임은 덕로가 산의 최측근인 만큼, 산이 덕로를 감쌀지도 모른다는 판단 하에 대비(장희진 분)에게 도움을 청하려다 산에게 발각되고 말았다.


사실 산은 사건의 진상을 모두 알고 있었으나, 덕로를 축출하려는 계산하에 최적의 타이밍을 보고 있던 중이었다. 산은 자신을 기다려주지 않고 대비전을 끌어들이려 한 덕임에게 분노했고, 덕임은 동무의 목숨을 정치적으로 활용하는 산에게 격분했다. 이에 덕임은 산의 마음에 생채기를 내려는 의도로 ‘전하를 연모한 적이 없다.


한번도 사내로서 바라본 적이 없다. 앞으로도 결단코 그럴 일은 없다’고 쏘아붙였고, 상처받은 산은 보란 듯이 덕임에게 입을 맞췄다. 그리고는 덕임이 입맞춤을 받아들인 순간 밀어내며 출궁을 명했다.




덕임이 출궁하고, 덕로가 관직을 내려놓고 궐을 떠난 뒤 1년이 흘렀다. 산은 이번에야 말로 덕임을 잊기로 마음 먹고 화빈(이서 분)을 새로운 후궁으로 들였다. 그러나 혜경궁(강말금 분)이 덕임을 궁으로 불러들이고 덕임이 화빈 처소의 궁녀로 산과 마주치기 시작하며 산의 다짐은 물거품이 됐다.


궁에 돌아온 덕임도 힘들기는 마찬가지였다. 산과 화빈의 모습을 곁에서 지켜보는 것은 가슴이 아렸고, 덕임을 질투한 화빈이 패악질까지 부리는 통에 몸도 마음도 지쳐갔다.


그런 와중에 덕로가 사망했다는 소식이 들려왔고, 덕로의 마지막 편지를 받은 산의 마음은 착잡해졌다.


이 과정에서 산은 어린 시절 금서를 읽은 자신을 위해 책장을 찢어 목숨을 구한 이가 덕로가 아닌 어린 생각시였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산은 자신을 도운 생각시가 덕임인지 확인하고자 화빈의 처소에 갔다가, 덕임이 화빈에게 괴롭힘 당하는 모습을 보고 격분했다. 하지만 공식적으로 덕임의 웃전이 아닌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그저 산은 덕임을 환궁시킨 혜경궁을 찾아가 원망을 쏟아낼 뿐이었다. 이에 혜경궁은 “이대로 그 아이를 포기하시겠습니까? 그 아이는 주상께서 행복해 질 수 있는 유일한 길인데. 부디 행복해지세요”라고 말하며 산을 다독였다.


극 말미에 어지러운 마음을 품은 산과 덕임이 단둘이 조우했다. 덕로의 사망 소식을 들은 덕임이 홀로 눈물 짓는 모습을 목격한 산은 마음이 무너져 내렸고, 여전히 덕임을 원하는 자신의 마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과거 자신을 도운 생각시가 덕임이라는 사실까지 확인한 산은 다시 한 번 애틋한 진심을 털어놨다.


뒤이어 산은 마지막이란 심경으로 “역시 너무 늦었느냐? 한 번 변해버린 것은 돌이킬 수 없느냐?”며 덕임의 사랑을 갈구했다. 하지만 대답 없는 덕임의 모습에 체념한 산은 조용히 돌아서 시청자들의 안타까움을 자아냈다.


그 순간 덕임이 산의 옷소매를 붙잡아 걸음을 멈춰 세웠고, 돌아선 산이 덕임을 품에 끌어안고 “널 그리워했다”며 고백하는 모습으로 극이 종료돼 폭발적인 여운을 선사했다. 동시에 아무리 밀어내도 멀어지지 않는 산과 덕임의 운명적인 사랑이 어떤 결말을 맺을지 궁금증을 수직 상승시켰다.




옷소매 붉은 끝동’은 자신이 선택한 삶을 지키고자 한 궁녀와 사랑보다 나라가 우선이었던 제왕의 애절한 궁중 로맨스 기록. 오는 2022년 1월 1일 오후 9시 50분에 16회, 17회(최종회)가 연속 방송된다.


▣ 드라마 ‘옷소매 붉은 끝동’ 기획의도



▣ 드라마 ‘옷소매 붉은 끝동’ 회차정보


1회: “난 동궁의 궁녀야. 세손 저하는 나의 주인이야” 어린 생각시 덕임은 제조상궁의 명으로 돌아가신 영빈자가께 조문을 가게 된다. 한편, 세손 이산은 영조 몰래 영빈자가의 처소로 향하는데...


2회: “궁녀와 반성문” 덕임이 지키는 서고에 어느 날 나타난 요상한 남정네! 알고 보니 꽃미남 겸사서? 한편, 세손 저하께 올릴 반성문은 도저히 통과 받을 기미가 안 보이는데...




3회: “호랑이 날뛰고, 용은 분노하네” 궁궐에 호랑이가 나타났다! 평화로웠던 궁녀 축제장은 아수라장이 되는데! 덕임과 친구들은 궁녀들을 무사히 대피시킬 수 있을까? 한편, 산은 익위사들을 이끌고 직접 호랑이 사냥에 나서는데...




4회: “모시기 힘든 주인” 겸사서 나으리가 사실은 세손 저하였다는 사실을 알게 된 덕임! 계례식을 앞둔 덕임에게 세손 이산은 앞으로 눈에 띄지 말라며 엄포를 놓는데...




5회: “사랑하여 나를 좋아하는 사람과 손 붙잡고 함께 떠나리” 영조는 대리청정의 뜻을 내비치고, 산의 정적들은 이를 막고자 계략을 세운다. 한편 자신을 미행한 덕임에게 출궁의 명을 내리는 산. 덕임은 무사히 계례식을 치르고 동궁 나인이 될 수 있을까?


6회: “동덕회의 젊은 여인” 산을 구하고자 동덕회에 가 밀명을 전하는 덕임! 덕임은 주상전하께 간언할 수 있는 사람을 찾아 산의 금족령을 풀 수 있을까?




7회: “푸른색 토시와 옷소매 붉은 끝동” 내가 사모하는 사람은 세손 저하야! 덕임의 속마음을 알게 된 산은 기쁨을 감추지 못하는데... 한편 저잣거리에서 곤경에 처한 덕임 앞에 나타난 한 사내! 그의 정체는 무엇일까?


8회: “절대 임금을 믿어서는 안 돼” 마음이 복잡한 덕임에게 제조상궁은 산의 후궁이 되기를 또다시 권유한다. 한편 오랫동안 간직해 온 여범이 발각되어 끌려가는 덕임! 산과 덕임은 무사히 위기를 넘길 수 있을까?




9회: “맞붙어 싸워라” 마침내 어릴 적 인연을 알게 된 산과 덕임, 한층 더 애틋해지는 두 사람. 한편 산은 영조를 대신해 행궁으로 능행을 떠나고, 제조상궁은 이를 기회 삼아 역모를 꾀한다! 산과 덕임은 시시각각 닥쳐오는 절체절명의 위기를 무사히 넘길 수 있을까?




10회: “용의 역린” 산은 군사를 움직인 일로 영조에게 의심받고, 덕임은 광한궁의 일원이 된 서상궁을 구하기 위해 나선다! 한편, 역모에 실패한 제조상궁은 영조의 연회를 앞두고 또 다른 계략을 세우는데...


11회: “금등지사의 비밀” 산은 연회에 생감과 게장이 올라온 일로 근신형에 처하고, 영조는 최후의 처분을 내리려 한다. 이에 덕로는 산에게 선위를 받아내라 간언하고, 덕임은 박상궁으로부터 금등지사의 비밀을 듣게 되는데!



12회: “조선의 왕” 영조는 매병으로 인해 산을 자신의 아들 사도세자로 착각한다! 한편, 덕임은 금등지사의 비밀을 알리기 위해 중전의 힘을 빌려 편전으로 향하는데... 과연 조선 왕좌의 운명은 어디로 향할 것인가.




13회: “왕의 여인” 궐에 또다시 역당들이 나타난다! 산은 아우가 역당의 일부임이 드러나자 고뇌하고, 덕임은 산이 느끼는 제왕의 무게에 덩달아 짓눌리는 듯하다. 밤이 되어 술에 취해 들어온 산은, 자신의 품으로 덕임을 이끄는데!




14회 : “사라진 궁녀” 원빈이 갑자기 세상을 떠나자 덕로는 미쳐 날뛴다. 한편, 경희는 덕임에게 쪽지 한 장을 남기고 홀연히 사라지는데... 덕임은 사라진 경희를 찾아 나서고, 산은 그런 덕임을 감시하라 명한다!


15회 : “진심을 속이지 마옵소서” 서고에서의 강렬한 입맞춤 끝에, 산의 명으로 평생을 살아온 궁을 떠나는 덕임. 1년이 지난 어느 날 산은 쏟아지는 비로 인해 청연군주의 사가에서 머무르고, 그 곳에서 덕임을 만난다. 두 사람의 어색한 재회는 어떤 결말을 맞이할까.




16회 : “후궁,왕의여인”




▣ 드라마 ‘옷소매 붉은 끝동’ 인물관계도

귀요미




역사속에서 보는 두 커플
산이와 덕임이 + 화빈 윤씨

산이, 정조



조선의 제22대 임금이자 한국사 최후의 명군이며 성군, 그리고 대한제국의 추존 황제. 선왕인 영조(英祖) 28년에 사도세자(思悼莊獻世子, 1735~1762)와 혜경궁 홍씨(惠慶宮 洪氏)의 사이에서 차남으로 태어났으나 출생 전에 형인 의소세손이 요절하여 실질적 장남이었다.


1752년(영조 28년)에 태어나자마자 곧바로 왕세손(王世孫)으로 책봉되었고 1762년에 사도세자가 비극적인 죽음(임오화변)을 겪자 요절한 영조의 맏아들 효장세자(孝章世子)의 후사가 되어 왕통(사위)을 이었다.




1775년부터는 대리청정을 하여 국가의 정사를 직접 관장하였으며 1776년 영조가 죽자 25세의 나이로 왕위에 올라 24년간 재위하다 1800년에 사망하였다.


할아버지 영조와 함께 조선 최후의 부흥기를 이끈 임금으로 평가된다.

파란만장했던 정조의 생애는 후대에도 다양한 이야깃거리를 남겨 많은 작품들을 탄생시키기도 하였다.


리얼 엄친아, 정조


정조가 유아 시절 외숙모에게 보낸 한글 편지. 정조는 8세에 세손에 책봉되었으므로, 자신을 원손이라 칭하는 이 편지는 세손 책봉 이전에 쓰인 것이다. 해독은 오른쪽 이미지인데, 해석되지 않은 '상풍의'는 현대어로 옮기면 '상풍(商風)에', 즉 '가을 바람에' 정도의 의미다. 의역하자면 '날씨가 쌀쌀한데' 정도 되겠다.


그 외에도 각종 기록을 보면 신하들에게 "내가 이렇게 똑똑한데 니들이 뭘 안다고 이러느냐?"며 신하들을 까는 장면이 많이 나온다. 문제는 명백한 사실이라 도저히 반박할 수가 없었다는 점이다.


실제로, 정조는 "내가 더 이상 경들에게는 배울 것이 없으니 내가 직접 교육을 해야겠다."라면서 왕이 신하들과 토론하며 학문을 배우고 정책을 논의하는 경연을 폐지하고, 임금 자신이 직접 교육을 시켜서 중하급 관리들을 발굴하는 초계문신제를 실시한다.


독서광이라는 기록도 많이 보이는 것으로 보아 정조가 공부벌레로만 보이지만, 알고 보면 그것보다도 훨씬 대단한 먼치킨이다. 세손 시절부터 문무를 겸비한 제왕을 지향했기에 무예를 익혀서 뛰어난 무예 실력을 갖추었다.




해당 자료는 고풍에 관한 것인데, '고풍'은 원래 조선시대 때 새로 부임한 관료가 하급자에게 공식적으로 선물을 내려준 과정을 기록한 문서를 말한다. 해당 자료는 활쏘기 이벤트 후 기분이 좋아진 정조 임금이 신하들에게 상을 내렸던 과정을 기록한 것이다.




이러한 정조의 고풍은 여러 장이 남아있는데, 하나같이 '20순 중에 98발 명중', '10순 중에 49발 명중' 이런 결과가 쓰여있다. 참고로 1순은 5발, 20순은 100발이다.


위 기록에서 보듯 활 솜씨가 대단히 훌륭해서 글자 그대로 '백발백중'. 화살 100발을 쏘면, 98발, 50발을 쏘면 49발씩 맞히고, 나머지 한두 발은 일부러 명중시키지 않았다


참고로 술도 좋아했다고 한다.


수원화성 팔달문 근처의 팔달문 시장(남문 시장) 입구 쪽에 보면 정조가 술상 앞에 앉아 있는 동상이 있다. 그 동상에 불취무귀(不醉無歸), 그러니까 '취하지 않으면 집에 못 간다'는 글귀가 새겨져 있다.


다만, 이는 진짜로 그런 의미로 쓴 것은 아니고, 백성들이 술에 취할 흥취를 즐길 정도로 나라를 부강하게 만들고 싶다는 정조의 의지가 반영된 글귀이다.



덕임, 후궁 의빈 성씨

조선의 제22대 왕 산이 후궁.


조선의 제22대 왕 정조의 후궁. 본관은 창녕(昌寧). 이름은 덕임(德任).

정조의 첫사랑으로 알려져 있으며, 그의 후궁들 중 유일한 승은 후궁으로 정조를 15년이나 기다리게 했다. 의빈 성씨는 어릴 때 궁중에 들어왔고 혜경궁 홍씨가 곁에 두고 길렀다. 작자·연대 미상의 고전소설 《곽장양문록》 국문 필사에 참여했다. 정조가 직접 쓴 《어제의빈묘지명》에 따르면 재능·기술·예술까지 완전히 갖춘 여인이었다고 전해진다.


《곽장양문록》 필사 당시 의빈 성씨의 친필 글씨



1766년(영조 42)에 정조가 승은을 내자 의빈은 울면서 “세손빈(효의왕후)이 아직 아이를 낳고 기르지 못하여 감히 승은을 받을 수 없다.”라고 말하며 죽음을 맹세하고 명을 따르지 않았다. 정조는 의빈의 뜻을 납득하고 물러났는데, 영조 재위 시절에 웃전의 궁녀를 후궁으로 삼으면 아버지 사도세자처럼 될 수도 있으니 당시에는 사건 자체를 덮은 것으로 추측된다.


1779년(정조 3)에 첫 번째 간택 후궁 원빈 홍씨가 사망하고 1780년(정조 4)에 화빈 윤씨를 간택하자고 했을 때 정조는 새 후궁을 들이는 것을 꺼리다 받아들였다. 화빈 간택 이후에 정조는 의빈에게 다시 승은을 내렸는데 의빈은 15년 전과 마찬가지로 거절했다.


이에 정조가 의빈의 하인을 꾸짖고 벌을 내리자 뜻을 굽히며 승은을 받아들였고 상의(尙儀)가 되었다.



거절의 이유

의빈 성씨가 정조의 승은을 2번이나 거절한 이유로 다음과 같은 추측들이 있다.

(공식적 이유) 왕과의 관계가 원만치 않고 슬하에 자식도 없는 왕비를 배려했기 때문.
여러 기록을 통해 의빈 성씨와 효의왕후 김씨의 사이가 무척이나 좋았다는 사실과 서로를 배려하는 모습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가설) 승은 후궁들의 삶이 순탄치 못했기 때문.
실제로 의빈 성씨가 정조의 승은을 수락하기 이전 조선 후기의 승은 궁녀/후궁들을 보면,

귀인 조씨(인조의 후궁) - 사사
승은상궁 이씨(인조의 후궁) - 사사
승은상궁 김씨(현종의 후궁) - '홍수의 변'에 연류되어 유배
희빈 장씨(숙종의 후궁) - 사사
정빈 이씨(영조의 후궁) - 독살
영빈 이씨(영조의 후궁) - 직접 친아들을 죽여달라 간청
폐숙의 문씨(영조의 후궁) - 폐출 및 사사
숙빈 임씨(사도세자의 후궁) - 첫 임신 때 낙태 미수 및 사도세자 사후 작호도 깎이고 어렵게 생활
경빈 박씨(사도세자의 후궁) - 사도세자에 의해 살해당함



(가설) 정조를 사랑하지 않았기 때문.
정조가 의빈을 사랑했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기록은 많지만, 의빈의 정조에 대한 감정을 기록한 사료는 없다.그러나 일개 궁녀가 사사로운 감정으로 감히 세손이나 왕의 뜻을 거스르는 것은 불충한 일로, 적어도 정조가 묘사한 의빈의 성품과 맞는 모습은 아니다.
더구나 궁녀는 어차피 사랑하는 남자와 혼인하여 가정을 꾸릴 수 있는 신분도 아니었다. 실제로 의빈이 정조를 사랑하였는가는 알 수 없는 일이지만, 그것을 이유로 승은을 거절했다고 보기에는 불충분하다.


(가설) 자신이 승은을 입는 것이 분수에 넘치는 일이라 생각했기 때문.
정조가 묘사하는 의빈의 성품은 항상 자신의 처우가 과분하다고 여겨 몸가짐을 극히 조심했기 때문에, 가능한 가설이다.


승은 이후 사망까지

1782년(정조 6) 9월 7일 인시(새벽 3시 ~ 5시)에 창덕궁 연화당에서 문효세자를 낳았다. 이 때 의빈을 딸처럼 키운 혜경궁 홍씨가 본가에서 데려온 몸종 복례와 유모 아지를 보내 출산을 도왔다. 정조는 1782년(정조 6)에 문효세자를 위해 창덕궁에 중희당을 건립했다.


의빈은 문효세자가 태어난 날 정 5품 상의(尙儀)에서 정 3품 소용(昭容)으로 올랐고[47], 문효세자가 원자로 정해지고 나서 1783년(정조 7)에 정 1품 의빈(宜嬪)으로 진봉 되었다. 정조가 직접 정한 빈호인 ‘의(宜)’는 ‘마땅할 의’ 자로 ‘마땅하다, 알맞다’라는 뜻이 대표적이지만, 그 외에 '화목하다, 화순하다'(온화하고 어질고 순하다), '아름답다, 선미하다'(착하고 아름답다)라는 뜻도 있다. 《어제의빈묘지명》에 묘사된 의빈 성씨의 행적을 보면 딱 알맞은 한자이다.


1784년(정조 8) 윤달 3월 20일 묘시(오전 5시 ~ 7시)에 옹주를 낳았다. 정조는 “아들이 있는데다가 또 딸이 생겼으니, 내가 참으로 기쁘다.” 라고 했다.


그러나 옹주는 5월에 병을 얻어 피접을 나갔고 결국 5월 12일 신시(오후 3시 ~ 5시)에 경풍으로 요절했다. 7월 2일에 문효세자가 왕세자로 책봉되었으나, 1786년(정조 10) 5월 11일에 홍역으로 요절했다.


의빈은 마음이 여리고 약해서 칠정(七情, 마음의 병) 증세가 있었는데, 문효세자가 사망하자 곧 중병에 걸렸고 본궁으로 피접을 떠났다가 조금 나아지자 다시 창덕궁으로 돌아왔다.정조가 그날그날 의빈이 씻는 모습을 보고, 약을 조제하고 달일 때 직접 살폈으나 병은 악화 되었다. 결국 항년 나이 34세에 1786년(정조 10) 9월 14일에 창덕궁 중희당에서 임신 9개월의 몸으로 사망했다.


죽음에 대한 의혹

정확한 사인은 알 수 없지만 《조선왕조실록》에서 정조가 "병이 이상하더니 결국 이 지경에 이르고 말았다"라고 말한 것을 볼 때 당시 의학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병을 앓았다.


일각에서는 의빈의 증세를 임신중독증으로 추측하기도 한다. 실제로 후궁이 된 이후 단기간에 수차례 임신과 출산, 유산까지 반복했으니 몸이 쇠약해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성덕임(의빈 성씨)의 죽음에 독살이 아니었느냐는 의혹이 제기되고 있다. 첫 번째로는 은언군이 자신의 장남 상계군을 보위에 올리기 위해 성덕임을 독살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두 번째로는 당시 내관 이윤목에 의해 성덕임이 독살당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마지막으로는 '이재난고'에 따르면 화빈 윤씨가 독을 썼다는 의혹이 있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덕임이를 질투하는 그녀 화빈, 화빈윤씨


정조의 두 번째 간택 후궁이다. 삼간택을 거쳐 1780년(정조 4)에 궁호는 경수(慶壽), 화빈(和嬪)으로 책봉되고 자경전에서 가례를 올렸다.


정조의 정비 효의왕후가 자녀를 낳지 못하고, 첫 번째 후궁 원빈 홍씨가 입궁한 지 1년이 채 안 돼서 자녀가 없이 갑자기 일찍 졸했다.


그래서 왕실의 후사를 잇기 위해 두 번째 후궁을 간택했다. 1780년(정조 4년) 3월 10일, 16세의 화빈 윤씨가 입궁해 후궁으로 책봉되었을 때 정조의 나이는 29세였다. 1780년(정조 4년) 3월 12일, 자경전에서 화빈의 가례를 행했다.


1781년(정조 5년) 1월 17일 화빈 윤씨가 임신하여 산실청을 설치했으나, 그로부터 10개월 후인 1781년(정조 5년) 11월 2일 화빈 윤씨의 출산을 기다리는 기록만 있을 뿐, 출산을 했다는 기록은 없다.



즉 열 달 동안은 배가 불러 있었다는 얘기가 된다. 따라서 진맥을 잘못했거나 유산한 것은 아니고, 상상 임신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후 화빈이 상상임신으로 인해 산실청이 설치된 지 약 1년 8개월이 지나도록 아이를 낳지 못하던 중, 의빈 성씨가 먼저 왕자(후일 문효세자)를 출산했다. 이로 인해 화빈의 위치가 애매해졌을 시기에 의빈이 방중술을 써서 왕자를 낳았다는 소문이 팽배해졌다.

정조의 후계를 바라던 왕실의 웃전 어른들이 이런 소문을 퍼트렸을리는 만무하니, 화빈 윤씨 측에서 의빈 성씨를 모함하기 위해 퍼트린 것으로 추정된다. 실제로 화빈의 고모부인 조시위(趙時偉)는 화빈이 후궁이 된 이후로 임금의 외척을 자칭하면서 조정 일을 제멋대로 좌지우지하고, 문효세자의 출생 당시에는 “호칭 정하는 일을 그렇게 서두를 것 없다.”라고 발언하며 의빈 성씨와 그녀의 아들에 대한 반감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결국 조시위는 화빈의 산실청 문제로 인해 제주도에 위리안치 되었고, 화빈은 목이 쉬도록 울면서 의빈 성씨를 원망했다고 한다.


두 사람의 관계가 얼마나 험악했던지 화빈을 안에다 엄히 가두고 궁호(宮號)를 방(房)으로 강등할지 의논했다는 소문과, 만삭이었던 의빈 성씨가 갑작스럽게 사망하자 화빈이 의빈을 독살했고 이로 인해 궁에서 내쳐졌다는 소문이 돌아다닐 정도였다.


이러한 야사와 기록들을 볼 때 화빈이 의빈을 싫어했던 것만큼은 확실하고, 그 이야기가 세간에도 널리 알려질 정도로 의빈에 대한 질투가 극심했던 것으로 보인다.


의빈 성씨는 7년 동안 5번이나 임신하고, 의빈 성씨 사후에 간택된 후궁 수빈 박씨는 14년 동안 순조와 숙선옹주를 낳았다. 수빈 박씨가 입궁했을 때 화빈 윤씨의 나이는 23살로 한창 임신을 할 수 있는 나이임에도 굳이 새 후궁을 간택한 것을 보면 화빈 윤씨는 총애받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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